중국 강소성(장쑤성) 여행
중국의 동부 양쯔강[揚子江] 하류에 있는 성. 성도(省都)는 난징[南京]. 면적 10만 2570 km2. 인구 6967만(1994). 황해·동중국해와 마주한다. 난징은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오(吳)나라의 도읍지였으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정부 때는 수도였던 역사적인 도시이다. 지역상으로는 상하이[上海]도 성역(省域)에 들어 있으나 행정상으로는 중앙정부의 직할시이기 때문에 장쑤성의 구역에서는 제외된다. 지형은 평탄하며 약간의 구릉이 솟아 있을 뿐 대부분 해발고도 50 m 이하의 평야이고 하천이나 용수로(用水路)가 많이 분포한다. 평야는 양쯔강·화이허강[淮河]을 경계로 쉬화이[徐淮] ·장화이[江淮]·장저[江浙]의 세 평야로 나뉘는데, 장저평야(江南삼각주)는 해발고도 5 m 이하로 가장 낮고 평탄하며 장화이 평야와 함께 수로망이 그물처럼 펼쳐지는 수향지대(水鄕地帶)이다. 화이허강은 송(宋)나라 때 하류 부분이 양쯔강에 침식당한 이후 지류가 없는 하천으로 변하여 좁은 수로를 따라 양쯔강으로 배수될 뿐이어서 수해(水害)가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공산정권 성립 후 치수공사가 진척되어 쑤베이운하[蘇北灌漑總渠]가 축조되어 바다로 빠지는 출구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장쑤성 북부의 알칼리성 지대의 관개도 가능하게 되었다. 호수는 화이허강 하류의 훙쩌호[洪澤湖]가 가장 크고 남부의 타이후호[太湖]가 그 다음이다. 기후는 온화하고 연평균강수량은 1,000 mm 내외로 비가 올 때에는 장마나 태풍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농업은 남부에서 벼농사, 북부에서는 밀을 주로 재배하며, 상품작물로는 목화를 주종으로 유채씨·땅콩 등을 산출한다. 남부에서는 양잠이 활발하고 차도 많이 생산한다. 예로부터 ‘고기와 쌀의 고장(魚米之鄕)’이라고 부를 만큼, 해안지대 외에도 하천·호소(湖沼)에는 담수어가 많아 담수어 양식업이 활발하다. 이 밖에 돼지·오리도 사육한다. 지하자원으로는 쉬저우[徐州] 부근에 대규모 탄전이 있다. 공업은 우시[無錫]·난퉁[南通]·창저우[常州] 등 3시(市)를 중심으로 하는 면방직, 쑤저우[蘇州]·우시의 견직물공업이 활발하며, 우시에서는 식품공업도 성하다. 난징은 중국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금속·기계·시멘트·방직 등의 공업도 발달하였다. 전통적인 수공업(手工業)에서도 견직물·칠기·죽기(竹器) 등이 여러 지방에서 제조된다. 후닝·룽하이[海]·진푸[津浦] 등의 간선철도 외에 내륙수운이 발달하여 강변지대의 하천망을 이용한 항로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수상교통의 대동맥인 양쯔강 연변에는 난징과 전장[鎭江] 등 2대 하항이 있다. 앞바다가 멀리까지 얕기 때문에 항구가 적지만 롄윈강[連雲港]은 북서부의 여러 성에서 바다로 나가는 지름길 구실을 한다. 난징·전장·창저우·쑤저우·우시·난퉁·타이저우[泰州]·양저우[揚州]·화이인[淮陰]·쉬저우·롄윈강 등 11개 시(市)가 있고 쑤저우·난징 등 역사적 도시는 풍경이 뛰어나며 사적도 많다.
중국 강소성 남경(난징)
남경은 양자강가에 자리잡은 강소성의 성도이며, 중국의 역사·문화 도시로서도 이름이 높은 곳이다. 흔히들 남경을 육조의 고도(古都)라고 하는데, 동오(東吳), 동진(東晋), 남북조시대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고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나라 초기 주원장(朱元璋)이 처음 남경에 도읍을 정했다가 제 2대 황제 때 북경으로 천도해 간 사실과 태평천국 난 때 남경에 그 수부를 두고 천경(天京)이라고 했던 사실 및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물려나기 전에 남경을 수도로 삼았던 사실들을 합치면 남경은 가히 구조(九朝)의 고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경은 역사적인 고도이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더 유명하다. 1842년 1차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가 중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에 중국 본토를 개방한 곳이며, 1937년에는 남경을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자행됐던 곳이다. 이 중에서 남경대학살은 약 3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에는 군인, 민간인 부녀자, 어린 학생, 심지어 유아까지 처참하게 살해했던 것으로 밝혀져 남경대학살은 중국이 당한 이민족의 침략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남경의 또 다른 특징은 여름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덥다는 것이다. 무한(無漢), 중경(中經)과 함께 중국의 3대 더운 지역으로 꼽힐 정도로 여름에 남경은 기온이 40℃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겨울에는 때에 따라서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기도 하며, 가을은 건조한 편이다.
관련학교 유명한 대학으로는
남경대학,
남경사범대학,
동남대학,
남경중의학대학,
남경예술대학 등이 있다.
중산릉(中山陵)
남경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중산릉으로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중산 손문(孫文)의 무덤이 있는 곳 다. 1926년부터 3년에 걸쳐 장개석이 만든 곳으로 면적은 8만㎡ 정도 되며, 자금산(紫金山) 남쪽으로 해발 158m 높이에 있다. 계단이 무려 392개가 있고, 5m 높이의 돌 입상이 무덤을 지키고 있어 그 방대한 규모가 느껴진다. 이 계단을 오르면 유리기와와 하얀 벽의 제당에 도착하며 당내에는 손문의 좌상이 있고, 안의 묘실에는 손문의 와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그 아래 관이 있다.
영곡사(靈谷寺)
중산릉 동쪽에 있고, 514년에 세워졌지만. 1318년에 현재의 장 로 옮겨졌다. 절 안에는 높이 60m에 9층 8각인 영곡탑(寧谷塔)과 1318년에 창건한 명대의 건물인 무량전(無粱殿), 송풍각(松風閣), 지공탑(志公塔) 등이 있다. 영곡사는 원래 양(梁)나라의 공주가 어느 수도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근에 있던 불교 건축군 가운데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는 건물이다.
명효릉(明孝陵)
명나라의 초대 황제인 홍무제 주원장(朱元璋)의 능묘로 1383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제 2대 황제인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능묘도 북경의 명 13릉으로 옮겨 지금은 그 화려함을 찾을 수 없다. 능 주위의 건축물은 대부분 청나라의 초기에 파괴되었지만, 12마리의 동물을 상징하는 12지신상과 4명의 장군상, 4명의 승려상이 지금도 있다.
현무호공원(玄武湖公園)
남경역과 시 북동쪽의 성벽 사이에 펼쳐진 호수 주변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현무호 안에는 다리와 토담으로 연결된 5개의 섬이 떠 있는데 누각(樓閣), 정(亭), 중국정원(中國庭園), 동물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5세기에 만들어졌을 때에는 수군 훈련과 열병, 황제의 별장지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여기서 남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높직한 언덕에 고루광장(鼓樓廣場)이 나오는데, 높이 30m나 되는 고루에서 보면 남경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고루의 건축 당시에는 13개의 성문이 있어 이 성문들과 고루까지의 거리는 모두 같았으며, 고루에서 울러 퍼지는 북소리는 성내 어느 곳에서든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루광장 동북쪽에 있는 대종정(大鐘亭)에는 구리로 만든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는데, 명나라 초대 황제 1388년에 만든 것이다. 이 종은 높이가 4백 27㎝, 구경이 2백 29㎝, 밑면 둘레가 17㎝이며 무게는 23t이나 된다고 한다.
남경박물관(南京博物館)
상해박물관과 더불어 중국에서는 소장품이 기로 소문난 곳으로, 강소성의 역사를 알려거든 한 차례 살펴보고 남경을 구경하는 것이 좋다. 이 박물관에는 전시된 3,000여 점의 전시품 중에서도 진기한 유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3,00년 된 오리알(진품), 비취로 장식한 장례복, 229년부 589년까지의 남경의 모습이 담긴 지도 등이 있다. 박물관 앞으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남쪽에는 빨간 담장으로 둘러싸여진 명고궁(明古宮)이 있다. 이 고궁은 명나라의 조정이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황성의 유적들이다.
태평천국 역사박물관(太平天國歷史博物館)
이 박물관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태ㅊ천국에 관계된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1850년의 전국 봉기로부터 1864년의 남경 함락까지의 모든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은 원래 명나라을 세운 주원장이 황제가 되기 전까지 사용했던 오왕부로 명나라 개국 후 공신인 서달(徐達)에게 하사되어 정원으로 사용되던 곳이였다. 그래서 이곳에는 아직도 '금릉제일원(金陵第一園)'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부자묘(夫子廟)
1034년에 세워진 부자묘는 공자의 사당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파괴되어 현재의 건물은 공산당 정부 수립 이후 복원된 것이다. 묘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옛날 그대로의 번화가가 조성되어 있어 고건축의 음식점과 상점이 즐비하다.
장강대교(長江大橋)
중국인의 기술과 자본으로 1960년에 착공되어 8년 만에 완성한 남경의 자랑으로, 길이 6,772m의 2층 다리로 위는 4차선의 차도이며 아래는 철로이다. 동쪽 연안의 대교공원(大橋公園) 내에는 높이 70m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리 위 계단으로 나갈 수 있는데,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장강의 조망은 마치 황색의 넓은 바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중화문(中華門)
명대 초기에 만들어진 남경성의 13개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문이다. 위에서 보면 남북 128m, 동서 90m, 세로가 긴 장방형을 하고 있으며, 4중문으로 되어 있다. 적이 바깥문을 뚫고 들어오면 문과 문 사이에 있는 아치형의 통로 위에서 문을 내려 적군을 가두고, 잠복해 있 던 3,000명의 병사가 적군을 섬멸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문에도 정문 외에 상하로 열리는『천급갑』이란 문이 달려서 완전히 닫을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연자기(燕子磯)
남경장강대교가 완성되기 전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바라보는 장강의 모습이 훌륭하여 많이 찾았던 곳으로 3면이 장강으로 둘러싸이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모습이 제비를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었다. 절벽 위에서 바라보면 건너편 물가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웅대한 옛날 그대로의 장강을 바라볼 수 있다. 언덕 위까지 돌계단이 이어지는데, 돌계단 위에는 작은 정자가 있으며 그 위에는 남경대학살기념비가 있다.
우화대(雨花臺)
중화문의 남단에 자리잡은 높이 100m, 길이 3,000m 남짓한 언덕을 우화대라고 하는데, 남경의 역사 비극을 목격해 온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열사공원(烈士公園)이 꾸며져 혁명열사기념관, 석박물관(石博物館), 지명열사묘(知名烈士墓) 등이 있으며 아주 깨끗이 단장되어 있다. 이곳에서 채석되는 우화석(雨花石)은 아름다운 색으로 유명하며, 물 속에 넣으면 투명한 빛깔을 낸다.
남경성장(南京城墻)
남경성장의 높이는 12m, 둘레는 33.4㎞, 성벽 두께는 7.62∼12m이다. 1368년부터 1387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동서로 5.62㎞, 남북으로 약 10㎞나 뻗어 있다. 남경성장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 중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이다. 이 성벽을 쌓는 데 쓰인 벽돌을 5개 성에서 만들 정도로 방대한 건축 공사였다. 각각의 벽돌에는 벽돌 제조공의 이름, 만들어진 날짜가 새겨져 있다.
중국 강소성 소주(쑤저우)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소주는 강소성 남부의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 서남쪽으로는 태호(太湖), 북쪽으로는 양자강(揚子江)과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상해(上海)에 근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항주(抗州)를 바라보고 있다. 도시 전체가 운하로 이루어져 있어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아름다운 정원과 미인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기대에 부풀어 그림같이 아름답고 낙원 같은 소주를 상상하다면 틀림없이 실망할 것이다. 하수구 같은 운하에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고 소주의 미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대운하와 외성하(外城河)가 마치 옥으로 만든 두 개의 허리띠처럼 아름다운 성곽을 둘러싸고 있는 소주는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기름져서 생산이 풍부한 '어미지향(魚米之鄕)'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민물고기를 위주로 한 각양각색의 맛있는 요리를 즐길 수 있다. 또한 예로부터 '비단의 고장'으로 알려진 도시답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비은 물론 자수와 공예품 으로 유명하다.
관련학교 유명한 대학으로는
소주대학이 있다.
4대 명원(名園)
창랑정(滄浪亭) 소주에는 4대 명원이 있는데 그 중에서 창랑정이 4대 명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약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 래 창랑정은 오대 오월 광릉왕( 陵王)의 개인 정원이었는데 북송 때 시인 소순흠(蘇舜欽)이 이 정원을 사들여 물가에 창랑정이라는 정자를 지은 데서 정원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소주의 다른 정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세련 된 배치와 대나무가 잘 어울린다.
유원(留園)
명나라 중기 개인이 만든 것인데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 춘 것은 청나라 때이며 그 때부터 유원이라고 불렀다. 중국 최고의 정원 중 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유원은 지천(池泉), 축산(築山), 정자(亭子)를 치 밀하게 조합한 디자인이 훌륭한데, 각각 4개의 영역마다 다른 취향의 광경 을 만들어낸다. 모두 건물의 직선과 곡선, 밝음과 어둠, 높음과 낮음을 절 묘하게 조화시킨 곳이다. 유원에는 또 유명한 것이 있는데, 회랑(回廊)에는 중국 역대 문인들의 필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으며, 화 (花窓)을 통해서 는 각각 다른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다.
졸정원(拙政園)
졸정원은 명나라 때 어사였던 왕헌신(王獻臣)이 중앙 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해서 지은 것이다. 진대의 시 한 구절 '졸자 지위정(拙者之爲政)'에서 본 이 정원을 졸정원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부지의 60% 정도가 연못으로 물 주변으로 누각과 정자 등이 있다. 이 정원 은 동원, 중원 및 서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지, 축산에 이어 건축이 조화 를 이룬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들 세 요소의 극치를 려면 중원의 원향당 (遠香堂)에 오르는 것이 좋다.
사자림(獅子林)
원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원대 말의 고승인 천려 선사(天如禪師)가 스승을 기념하기 위해 사원으로 건립한 곳이다. 그 정원 에 스승이 예전에 살았던 저장성 목산(天目山) 사자암(獅子岩)과 비슷한 사자 형태의 태호석을 수없이 배치하였기 때문에 그 후에 사자림(獅子林)이 라는 이름을 붙었다고 한다. 사자림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입설당(立雪堂)은 제자가 스승을 찾아갔다가 잠든 스승을 감히 깨우지 못하 눈 속에 서 있었다는 고사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한산사(寒山寺)
7세기 당나라의 시인 한산이 기거해서 한산사로 불리며 장계(張繼)의 '풍 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로 더 유명해진 소주의 대표적인 절이다. 몇 차례 전란으로 소실된 적이 있으며, 현재의 건축은 청나라 때 중수한 것이다. 문 전에는 소운하가 흐르고 둥근 다리 아래를 작은 배가 다니는 유장한 분위기 이지만 당시 이 일대는 상업의 중심지로 주야의 구별 없이 배가 오갔다 한다.
호구(虎丘)
호구는 북서쪽으로 5㎞ 거리의 산당가(山塘街)에 자리잡고 있으며 춘추시 대 오왕 부차가 부친 합려(闔閭)를 매장했다는 곳이다. 호구라는 이름은 장례를 지낸 지 3일째 되던 날 백호(白虎) 한 마리가 나타나 능을 지켰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호구에는 광대한 면적 내에 여러 가지 명소가 자리잡고 있는데, 첫째 볼거리는 호구산 정상에 있는 운암사탑(雲岩寺塔)으로 높이 47.5m인 8각형 7층탑인데, 약 15도 기울어져 있어 눈으로 보기에도 기울어진 경사가 느껴진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칼로 베어난 듯 둘로 갈라진 시검석(試劍石)이 있는데, 오왕 합려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시험삼아 잘랐다는 전설이 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천인석(千人石)이라는 평평한 바위가 오는데, 이곳에서 1,000명이 앉아서 승려의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천인석 옆에 있는 둥근 문을 들어서면 검지(劍池)라는 조그만 샘 같기도 하고 못 같기도 한 것이 벼랑 아래에 있다. 검의 못이라는 뜻의 검지라는 말은 사실 오왕 합려의 묘로서 그를 묻을 때 그가 아끼던 애검 3천자루를 함께 묻은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북사탑(北寺塔)
소주시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는 인민로의 북부에 있는 강남 지역에서 제일 높은 76m의 탑으로 이곳에 올라가서 소주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원래 창건 한 것은 양(梁)나라 때이지만, 현존하는 것은 남송(南宋) 때인 1153년에 중건한 것이다.
망사원(網師園)
5,000㎡의 부지에 조성된 정원으로 소주시에 있는 정원 중에서 가장 작다. 그러나 정교하고 밀하게 꾸며져 실제보다는 크게 느껴진다. 이 정원도 졸정원과 마찬가지로 역시 동·중·서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동부는 주택구,서부는 화원구, 중부는 망사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수원구이다.
보대교(寶帶橋)
소주 남쪽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를 따라서 걸쳐 있는 길이 317m의 아치형 석교이다. 전체 53개의 아치형 공교로 이어져 있어 중국 최장의 석교로 간주되고 있다.
중국 강소성 무석(우시)
무석은 중국에서 3번째로 큰 담수호인 태호(太湖)에 인접해 있는 도시로, 경항대운하가 지나가며 시내 곳곳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다. 본래 무석은 주석이라는 광물이 많이 나왔는데, 한나라 초기에 모두 파내 '주석이 없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은 공업도시로, 별로 볼거리가 없기 때문에 여행자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러보는 정도이다.
관련학교 유명한 대학으로는
강남대학이 있다.
태호(太湖)
무석의 남서쪽에 넓게 자리잡은 담수호로 호수 안에 72개의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으며, 주위의 녹정산(鹿頂山)·여원·매원 등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6-2. 석혜공원(錫惠公園) 석문에서 15㎞ 떨어진 곳에 있는 혜산과 금산을 포함하는 큰 구역에 걸쳐 있어 이름지어진 것이다. 1500여년 전의 남북조시대에 세워진 혜산사에는 향하교, 대동전, 당대의 청송정, 명대의 우공곡, 청대 건룡제의 어비정 등 수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공원 내에는 천하제이천(天下第二泉)이라는 유명한 샘물이 있는데, 중국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물이라는 뜻의 이 샘물은 당의 육우(陸羽)라는 사람이 지은 것이다. 그리고 '천하제이천(天下第二泉)'이라는 글자는 원나라의 유명한 서예가 조맹부가 쓴 것이다.
매원(梅園)
태호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있는 정원으로 중국의 강남에서 매화를 감상할 수 있는 명승지 중의 하나이다. 이 정원의 넓이는 34만㎡로 이름 그대로 매화나무가 수 천 그루 심어져 있다. 매년 초봄 매화꽃이 피어 있을 때 눈이 내리면 더할 수 없는 경관을 만들어 내어 각지에서 구경하려는 인파들로 붐빈다.
여원
태호 호숫가에 있는 면적 5.5ha의 여원은 전망이 멋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풍부한 태호석으로 쌓아 올린 축산은 꼬불꼬불 구부러진 미로처럼 뻗어 있다. 호수를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세워진 4개의 사계정이 호면에 그 모습을 비추고 있다. 원래는 개인 정원이었는데, 해방 후 사유재산으로는 너무 크고 화려하다고 하여 재정비되어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용두자공원
태호 위에 떠 있는 섬으로 큰 거북의 머리와 비슷한 형태로 인해 그 이름이 붙어졌다. 태호의 경관을 감상하는 데에는 이곳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실망감을 안게 된다.
중국 강소성 양주(양저우)
장강의 북쪽에 위치한 고도(古都)로 춘추전국시대의 오(吳)나라 왕 부차가 성을 축성한 곳이다. 수나라 때 판 운하가 아직도 남아 있는 도시로, 도시 규모는 작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예로부터 소금의 집산지였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지금은 기계, 디젤엔진공업 등이 발달하고 있다.
관련학교 유명한 대학으로는
양주대학이 있다.
문봉탑(文峰塔)
양주에서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명대에 건축한 높이 30m 팔각주의 7층탑인 문봉탑으로 이 위에 올라가면 양주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남경에서 운하를 타고 양주로 들어서면 문봉 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이 탑을 양주의 상징이라고 칭한다.
유사호(庾四湖)
양주 시가지와 대명사(大明寺) 사이에 있는 호수로, 시내의 샛강이 그대로 호수에 이어져 호면에 늘어진 버들, 강 위에 걸린 다리, 격 있는 정자나 누각 등 수대로부터 시대를 거듭하여 정원예술의 정수를 다해 만들어진 것이다. 유사호공원 내에는 오정교(五亭橋)와 백탑(白塔)이라는 이름난 명소가 있는데, 오정교는 다리 위에 다섯 개의 정자가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고, 백탑은 탑의 색깔이 흰색이기 때문에 붙어진 이름이다. 이 곳은 유사호공원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오정교의 노란 기와와 백탑의 흰색, 수양버들의 연녹색이 묘한 색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대명사(大明寺)
이 절은 남북조 송대의 대명년간(457∼464년)에 세워졌으므로 대명사라 하는데 그 뒤로 몇 번인가 이름을 달리했다. 지금도 산문에는 대명사로 불리기 전의 이름인 법정사(法淨寺)라는 글자가 씌어 있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절이기 문에 관광객들이 즐겨 찾지는 않는다.
관음산(觀音山)
양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당나라의 성터 유적지로서 성터 옆의 관음사라는 절에는 성터에서 발굴된 문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당성유적지라고는 하지만, 흙벽만 남아 있을 뿐이고 시선을 끌 만한 것이 없다.
평산당(平山堂)
평산당은 북송의 구양수(區陽修)가 세운 것으로, 대명사의 서쪽에 있다. 본래 이곳에 앉아서 강남의 먼 산들을 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온통 덩굴로 덮여 고 찾는 이마저 없어 적막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보합정묘원(普哈丁墓園)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16대 손으로 양주에서 포교를 하다 죽은 보합정의 묘가 있으며 다른 아랍사람의 묘도 있다. 아랍양식의 문과 중국과 아랍식이 혼합된 망월정(望月亭)이 보이며, 이 망월정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가면 보합정의 석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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